
🏡 살아가는 이야기, 그 첫걸음 – 우리 가족의 미국살이 28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언젠가 꼭 한번은 꺼내보고 싶었던 이야기, 바로 제 삶의 이야기입니다. 여행도, 명소도, 영화도 좋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엔 결국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이 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블로거를 시작한 궁극적인 이유이자 최종적인 목표인 제 생활의 단상, 그리고 우리 가족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눠보려 합니다.

미국이민 28년, 그리고 세 자녀의 성장
저는 올해로 만 63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8년 동안 미국이라는 낯설고도 익숙해진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1987년, 동갑내기 아내와 만나 단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런 큰 결정을 내렸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담대한 용기를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아이와 둘째는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과 4살이던 두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미국 땅을 처음 밟았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막내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이제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민자로서의 지난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실감합니다.

🎓 첫째 딸 – 예술을 사랑한 아이
첫째는 대학에서 서양 근대 미술사(Art History) 를 전공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책을 즐겨 보고 미술관에 가면 눈을 반짝이던 아이였지요.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예술과 관련된 길을 걸어가며 자신만의 감성과 시선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 둘째 아들 – 정의감이 강했던 아이
둘째는 범죄심리학(Criminology) 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정의와 질서에 대한 관심이 컸고, 졸업 후에는 로컬 시티 경찰서(City police department) 에서 경찰관으로 3년간 근무했습니다. 치열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도 알게 되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아마도 그의 삶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 막내딸 – 약사의 길을 걷는 딸
막내는 이곳에서 태어나 가장 미국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재작년, 약학대학원(Pharmacy School) 을 졸업하고 미국 약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현재는 미국에서 가장 큰 약국 체인 중 한 곳에서 근무 중입니다. 환자들과 소통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건강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모습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 가족은, 곧 나의 이야기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저는 이민자였고, 부모였고, 또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아이들의 성장과 삶의 여정은 곧 저와 아내의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외롭고 낯선 타지였지만, 함께였기에 버틸 수 있었고, 또 함께였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서두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이 블로그를 통해 제가 겪은 이민자의 삶, 세 아이를 키우며 겪은 기쁨과 고민,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단상들을 천천히 풀어가려 합니다.
🙏 신앙으로 지켜온 가정 – 서로 다름 속에서 같은 길을 걷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루하루가 하나의 기도였고, 또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제 삶의 단상 중,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가족과 신앙, 그리고 부부의 여정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 다른 두 사람, 그러나 같은 길
저와 아내는 성격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달랐습니다. 오랜 시간,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솔직히 제가 저지른 말의 칼날—언어적 폭력—이 가장 큰 상처였다는 것을 지금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인내와 기도 덕분입니다. 조용히 흘린 눈물의 기도, 드러내지 않은 상처 위로의 기도, 그리고 가정을 붙드는 믿음의 기도가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 신앙으로 이어진 인연
놀랍게도, 저와 아내는 어린 시절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 때로는 부족함과 외로움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중학교와 국민학교 시절, 각자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교회에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뜨겁고 감정적인 신앙이었고, 아내는 조용하고 성실한 신앙이었습니다. 저는 열정으로, 아내는 인내로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교회 일을 함께하면서 결국 서로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고, 결혼식도 교회에서 올렸습니다.

지금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장모님입니다. 늘 기도로 살아가시는 모습,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돌보는 삶. 제게 신앙은 그저 종교가 아닌,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 신앙이 같기에, 자녀 교육엔 다툼이 없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르다고만 생각했던 부부였지만,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치관은 같았다는 것을요.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한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를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저희가 자녀에게 주고 싶은 인생의 가장 큰 유산이었습니다.

✈️ 영어 한마디 못한 초기 이민자, 그리고 부모의 사명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는 유치원에 해당하는 킨더가든(Kindergarten) 에 들어갔습니다. 영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했고, 이민자로서 어떤 기술도 전문성도 없이 거칠고 험한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몸은 힘들고 마음은 외롭고, 자녀들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라 막막한 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믿음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삶을 살면
어디에서 살든, 어떤 상황이든, 결국은 그 삶이 행복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믿음 하나로 자녀들을 키워냈습니다. 큰아이와 둘째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두 공립학교(public school) 를 다녔고, 막내는 약학대학(pharmacy school) 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사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환경이 아이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믿음과 부모의 태도, 그리고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자녀의 인생을 붙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한 고민
처음에는 막연한 믿음과 가치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들의 눈빛 속에서, 그들의 선택과 삶 속에서 그 믿음이 열매 맺는 것을 하나씩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블로그를 통해 앞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 이민자로 살아가는 분들과 어떤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에 대해 진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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