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문학/문학, 창작

"La Menace" 와 이광수의 소설"유정"

by 킴차카 2025. 6. 23.

 

팟캐스트해설/바이칼호수

🎬1977년의 기억, La Menace(라미나스)와 이광수의 ‘유정’ — Plouha 절벽 과 Baikal 호수, 사랑과 죽음

고등학교 2학년이던 47년 전 어느 날, 문학과 철학, 시와 사랑에 미쳐 학교를 땡땡이치고 향한 곳은 종로구 청와대 옆의 작은 프랑스 문화원 영화관. 그곳에서 우연히 보게 된 한 편의 영화가 아직도 제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풍경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영화는 바로, 알랭 코르노(Alain Corneau) 감독, 이브 몽땅(Yves Montand) 주연의 La Menace (1977) — 우리말로는 ‘라미나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영화입니다.

🖼️ 줄거리 요약: 치명적인 사랑의 그림자

이브 몽땅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 헨리(Henri)는 고속도로 운송회사의 중역이자, 아내의 회사 운영을 실질적으로 맡고 있는 남성입니다. 그는 회사의 여직원인 줄리안느(Julienne)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여전히 결혼 상태에 있습니다.

아내 모니크는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바닷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줄리안느와 격한 언쟁을 벌이다가 충격적인 선택을 합니다 — 그녀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택하지요. 문제는 경찰이 이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살인으로 규정하고, 줄리안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헨리는 애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내가 죽은 날의 알리바이를 일부러 없애고, 줄리안느조차 모르게 철저한 시나리오를 짜며 자신을 범인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마치 자기가 아내를 죽인 듯한 단서를 남기고, 결국 장인의 복수로 쫒기며 소형차로 도주하던중 장인이 사주한  대형 트레일러트럭이 앞뒤 좌우로 막으며 차사이에서 압사하며 죽음을 택하고, 애인이 경찰서에서 풀려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엔딩을 맺습니다....

La Menace 1977 Trailer

애인을 구하기위해 그녀에겐 비정하게 대하고 혼자만의 선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애인을 구하는 그의 사랑이 평생 가슴에 남아 있는 영화입니다...

그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줄리안느는 혐의를 벗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위한 사랑의 희생, 죽음으로 완성된 애절한 구원이었습니다.

🌊 잊히지 않는 풍경: 절벽과 바다, 그리고 사랑의 끝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아내와 애인이 함께 절벽 위에서 벌이는 말다툼 장면입니다. 카메라는 절벽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회색빛 바다, 서늘한 프랑스의 해안을 배경으로 두 여성 사이의 감정과 질투, 고통을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한 남자의 이중적인 삶과 두 여성의 파국적인 감정을 절벽이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는 시각적 시(詩)였습니다.

 

📚 이광수의 장편소설 유정 — 사랑의 유배지 바이칼호, 그리고 죽음과 영원

영화 La Menace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겹쳐지는 이미지는 바로 이광수의 전작장편소설 《유정》(1939)입니다.                          <유정>은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조선일보'에 매일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남자주인공(최석)은  사실상 형님처럼 모시던 친구의 딸(남정임)을 사랑하게 되며,사회적 윤리상 금지된 관계로 비춰져 심한 갈등과 심리적 압박을 겪게됩니다.특히 정임의 어머니는 두사람을 "불순"하고 "패륜적인 감정"이라고 맹렬한 비난을 합니다.

좌책감을 느끼면서도 정임에 대한 감정을 지후지 못한 최석은 결국 시베리아 바이칼호 호숫가 외딴 오두막으로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하듯 도피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남정임은 최석을 찾아 바이칼호 최석의 오두막을 찾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이후 정임은 고독과 여운의 아픔속에 자신도 병든 몸으로 최석의 흔적을 더듬으며 오두막에 남는 이야기로 소설은 마칩니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오두막, 결국 최석의 죽음으로 마침내 함께할 수 있었던 그들의 사랑,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찾아온 먼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오두막에서  사망한 최석을 보며 자신또한 긴 여정과 상실감에 병이 들어 최석의 뒤를 따르는 암시가 그시절 제게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습니다.이 장면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비극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완성으로 기억됩니다.

Lake Baikal

🧠 그 시절, 문학과 영화에 빠진 소년의 감정

그 시절, 저는 학교보다도 무료 외국문화원의 영화관과 도서관이 더 익숙했습니다.

책가방에 당시 대학입시 필독서 였던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정통 영어'보다는 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한 시,소설,철학책들로 가득 채우며 영어단어나 수학 공식대신 하루에 시한편씩 외운다는 다짐아닌 겉멋으로 지냈었던 그때에 '이광수'의 "유정"과 프랑스 영화 "La Menance"를 비슷한 시기에 보았다는 것이 어쩌면 평생 문학과 영화를 좋아하게된 계기인 것 같습니다.

이브 몽땅의 눈빛, 줄리안느의 침묵, 절벽 위에서 갈라지던 운명의 소리, 그리고 이광수의 문장 속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던 사랑과 죽음의 환상. 무료였던 프랑스 문화원에서 자막도 없는 생소한 불란서 영화를 문을 닫을때까지 몇번씩 보고,상영영화를 바꾸는 주말 내내 보았던 그 영화 "La Menance" 를 추억하며 그 십대의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열일곱 살의 감수성에 불을 지폈던 기억입니다.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더 순수했고, 죽음으로 완성되었기에 더 깊었습니다.

 

“사랑은,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비극일지라도 오래도록 마음을 적신다.”

지금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랑조차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지만,
그 시절에는 한 편의 영화,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모든 감정의 세계였습니다.